북로그: 자유로부터의 도피
계속 해보려는 새 코너의 첫 글. 책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, 읽고 나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짧게 적어두는 자리다.
이번엔 에리히 프롬의 《자유로부터의 도피》.
나를 따라다니며 쓴 것 같은 책
중세 길드에서 종교개혁 신학까지 아우르는 책이 마치 나를 따라다니며 쓴 것처럼 읽힐 줄은 몰랐다.
몇 챕터 들어가니까, 어느 순간부터 사회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나에 대한 분석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. 좋은 의미로는 아니다. 내가 생각하는 방식, 내가 자꾸 기대게 되는 것들, 나에 대해 속으로 믿고 있는 것들 — 프롬은 그걸 전부 이런 사회라면 으레 찍어내는 결과로 설명한다. 내 고유한 성격이 아니라,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산물로.
내가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던 두 가지를 그가 짚었다.
나는 일을 단순히 돈 버는 수단보다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긴다. 거의 내 가치를 찾으러 가는 자리에 가깝다. 그리고 나는 삶의 의미라는 걸 잘 못 찾는다. 어찌나 어려운지, 그 질문 앞에 가만히 앉을 틈이 안 나도록 자꾸 다른 일로 시간을 채우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.
그 두 가지만큼은 나에게서 나온 거라고 믿고 싶었다.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아니라고 — 적어도 온전히 나에게서 나온 건 아니라고 — 차분하게 논증한다. 거기엔 역사가 있고, 그 역사는 500년쯤 됐다.
무력감에서 연료로
처음 든 감정은 무력감이었다. 환경이 내 생각과 심지어 내 목표까지 만든 거라면, 그중 어느 것도 내가 진짜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.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읽는 건 꽤 암담하다.
그런데 그 감정이 뒤집혔다. 예상 못 한 방향으로. 이게 정상이라면 — 이런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다 비슷한 회로를 갖고 있다면 — 이건 내가 고치거나 졸업해야 할 결함이 아니다. 오히려 써먹을 수 있는 무언가다. 진단이 아니라 연료. 질문이 “이 불안에서 어떻게 벗어나지”에서 “이걸 어떻게 쓰지”로 바뀐다.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삶이다.
이 회로는 어디서 왔나
프롬은 책 전체를 하나의 질문을 따라가는 역사로 쓴다. 개인이란 무엇이고, 또 얼마나 혼자인가.
중세엔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‘개인’이 없다. 농노이거나, 장인이거나, 누군가의 아들이다. 역할이 곧 정체성이고, 그건 태어날 때 주어진다. 숨 막히고 자유는 없지만, 동시에 고립도 없고 “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지”라는 질문도 없다. 애초에 답이 내가 정할 몫이 아니었으니, 질문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.
르네상스가 그 자아를 풀어내기 시작한다. 개인이 등장하고 — 동시에 경쟁, 비교, 혼자됨도 같이 온다. 자유와 고립이 한 묶음으로 도착한다. 이게 그 이후 모든 것의 패턴이다.
종교개혁에서 프롬은 가장 날카로워지고, 나는 거기서 나를 가장 많이 봤다. 루터: 인간은 신 앞에서 무력하고 무가치하며, 오직 완전한 굴복으로만 구원받는다. 칼뱅: 예정설 —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,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고 끝없이 강박적으로 일한다. 프롬은 이걸 현대적 성격의 심리적 설계도로 읽는다. 일에 대한 강박, 만성적인 자기 의심, 기꺼이 권위에 굴복하는 태도.
그 마지막 문단은 사실 맨 위에 적은 내 고백을 16세기 언어로 다시 쓴 것일 뿐이다. 일을 자기 가치의 증명으로 대하는 내 안의 그 부분은, 뿌리가 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.
프롬의 진짜 답: 자발적 활동
여기는 내가 계속 상담실에서 나올 법한 말들로 메우려 했던 부분이다 — 데이터로 받아들여라, 현재에 집중해라, 자신에게 친절해라. 그런데 책엔 그것보다 훨씬 날카로운 답이 이미 있었다.
그는 자유를 둘로 나눈다. ~로부터의 자유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다. 옛 유대가 떨어져 나가면서 거기서 자유로워지지만, 동시에 혼자가 되고, 불안은 바로 그 혼자됨에서 나온다. ~를 향한 자유는 그가 제시하는 유일한 진짜 해결책이고, 거기엔 구체적인 작동 방식이 따라붙는다. 자발적 활동.
자발적 활동은 “기분 나아지려고 뭐든 해라”가 아니다. 프롬은 구체적이다. 자유롭고 스스로 시작한 행동, 딱 두 자리에서 — 사랑과 일.
사랑은, 나를 누군가에게 연결시키면서도 나를 분리된 채로 둘 때만 유효하다. 혼자됨을 피하려고 상대의 권위 속에 나를 녹여 없애는 건 해당 안 된다. 그건 더 예쁘게 포장한 굴복일 뿐이다.
일은, 생산적일 때만 유효하다. 내 능력이 진짜로 발휘되는 일이어야 하고,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려는 노동이거나 느낌을 덮으려고 바쁘게만 구는 거면 해당 안 된다.
이 둘을 진짜로 하는 게, 분리된 한 사람이 아무것에도 다시 굴복하지 않으면서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방법이다. 그게 혼자됨의 견딜 수 없는 부분을 풀어준다. 느낌을 관리하는 게 아니다. 버티는 것도 아니다. 그 안을 통과하며 행동하는 것이다.
그러니 실질적인 답은 “불안을 데이터로 받아들여라”라는 추상이 아니다. 개인으로서 그걸 다루라는 거다 — 그 불안한 에너지를, 진짜 내 것인 일에, 아니면 나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 관계에 넣으라는 것. 느낌을 덜어내려고 무언가에 손 뻗는 대신에. 탈출구와 치유는 밖에서 보면 닮았다. 안에서 느끼면 전혀 다르다.
불안은 신호다 — 그리고 편안함도 신호다
이게 잡히고 나니, 내 나름의 작은 생각 두 개가 제자리에 맞물렸다. 이건 프롬의 주장이 아니라 내 확장이다.
일상의 불안 — 이 일, 이 프로젝트, 이 계획에 대한 — 을 나는 고장이 아니라 정보로 읽기 시작했다. 지금 이 자리가 더는 안 맞는다는 신호로. 이걸 한 번도 못 느낀다면, 사실 아무것도 선택 안 하고 있는 거다. 물려받은 기본값 위에서 흘러가고 있는 거지.
그리고 편안함도 신호다, 방향만 반대다. 오래 안정된 구간은, 내가 조용히 선택을 멈추고 관리만 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. 그저 알아챌 만큼 아프지 않을 뿐. 불안이 없다는 게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. 가끔은 한 번도 제대로 결정한 적 없는 현재 상태를 그냥 지키고 있다는 증거다.
행복은 과정이지, 출구가 아니다
여기서 내 행복관이 바뀌었다.
나는 행복을 불안이 마침내 사라진 상태로 여겨왔다. 프롬의 관점, 그리고 그 관점으로 다시 본 내 경험은 정반대를 말한다. 과정 자체가 행복이라고. 뭔가를 이루고, 거기서 실패하고, 그 실패가 가르친 걸 배우고, 다음 걸 하는 — 그 반복은 행복해지기 전에 치르는 값이 아니다. 이 사회의 자유로운 개인에게는, 그 반복이 행복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. 행복은 자유 뒤에 오는 게 아니라 자유와 함께 온다. 단, 선택을 내가 하고 있을 때만.
실패는 시스템이 고장 난 게 아니다
진짜 일을 하고 있다면, 그 일에서 반복해서 실패하게 된다. 진짜라서, 짜인 대본이 아니라서. 다음 시도에 가능성이 있을 땐 불안을 성장의 신호로 보는 게 깔끔하다. 똑같이 세 번째 실패하고 불안이 아무것으로도 안 풀린 채 그냥 남아 있을 때는 전혀 깔끔하지 않다.
여기서 열린 질문으로 끝내려 했다. 그런데 답이 있었다. 생물학과 과학이 이미 오래전에 내려둔 답과 똑같았다. 실패는 시스템이 고장 난 게 아니라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. 어떤 생물도 자기 환경에 대한 설명서를 받고 태어나지 않는다. 시도하고, 환경이 밀어내고, 거기 맞춰 조정하고, 다시 시도한다. 그 반복이 — 실패의 부재가 아니라 — 적응이다. 예상 밖 결과를 얻은 과학자는 “나는 형편없는 과학자다”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. “모델은 이렇게 예측했는데 실제론 저랬다, 변수를 바꿔서 다시 돌리자”고 결론 낸다.
그러니 세 번째 실패는 원래 그 자체로 불안을 풀어줄 일이 아니었다. 내가 뭘 잘못 짚었는지를 업데이트해서, 네 번째 시도가 처음 세 번보다 나은 정보를 들고 시작하게 하는 역할이었다. 불안은 내가 멈춰 있다는 신호가 아니다. 불 켜고 다음 실험을 돌리는 비용일 뿐이다. 실패 하나하나는 결과지 판결이 아니다 — 그리고 그 반복은, 애초에 진짜 일을 하고 있어야만 돌아간다.
이 책에서 가져간 것
불안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다. 이런 사회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사는 데 드는 정상적인 비용이고, 이런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갖고 있다. 그 재해석 하나가 거의 전부였다.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는 걸 멈추고 써먹을 수 있는 걸로 다루기 시작하자, 불안은 적이 아니라 신호가 됐고, 실패하고-조정하고-다시-하는 반복은 내가 뒤처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냥 사는 일 자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.
개인적인 부분도 인정하자면,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먹고산다. 늘 운이라고 여겨온 것이다. 그런데 이 책이 거기에 의미를 하나 더 얹어줬다. 내가 운 좋게 하고 있는 그 일이, 이 사회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려면 사람이 해야 한다고 프롬이 말한 바로 그 한 가지에 가깝다는 것. 그래서 이 책은 분석보다는 안도감에 가깝게 읽혔다.
그러니 이건 책 소개가 아니라 진심 어린 추천이다. 선택지가 너무 많을 때의 조용한 두려움을 느껴봤거나,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본 적 있다면, 《자유로부터의 도피》는 그게 어디서 오는지 보여줄 것이다 — 그리고 “그냥 마음 편히 먹어”나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보다 더 건강하게 그걸 안고 가는 법을 줄 것이다. 그 느낌은 흔하고, 정상이다. 우리에 대해 쓴 것처럼 읽히는 오래된 책이다.